초대교회의 몇몇 지체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여섯째 날에 함께 모였으니 가장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돌이킨 후 주님의 만찬을 거룩하게 행했다. 거룩한 것을 먹고 마신 후에 온 힘을 다해 자신과 다른 영혼이 거룩에 이르도록 주의 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고 아버지께로 부르짖어 구했다. 목자들도 양들도 다 함께 무릎 꿇고 아버지의 거룩하신 말씀을 전하며 받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성소를 향하여 두 손을 높이 들고 여호와께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송축했다. 후식을 나누며 주님 나라의 소망을 보고들은 후 거룩하신 영의 탄식에 따라 죽어가는 이웃영혼들의 깨어남과 큰 구원을 위해 부르짖었다. 그리고 만찬을 마친 후 모든 지체가 마음과 영혼에 만족을 얻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간 한 지체가 육의 욕심에 이끌려 범죄한 것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애통하다 문득 아버지께로 부르짖어 회개하며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곳이 떠올랐다. 그러므로 애통하던 그는 소망을 가지고 자신의 형편에 맞게 먹을 것 한 가지를 준비해 공동체를 찾아가되 먼저 목자가 거하는 사택의 문을 두드렸다. 목자가 나오자 그는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알린 후 제사를 드려달라며 참새를 내밀었다. 그러나 목자는 지금은 예배를 마치고 쉬고 있으니 내일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는 고개를 떨구며 정성껏 준비한 제물을 가지고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으나 갈 곳이 없으니 이리저리 방황했다. 잠시 후 다른 한 지체가 자신과 가족의 먹을 것이 하나도 없어 고민하다 거룩한 공동체에는 아버지께서 가난한 영혼들을 위해 준비하신 영과 육의 양식이 항상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떠올랐다. 그러므로 목자를 찾아가 문을 두드리며 자신과 가족들의 영혼이 먹을 것을 조금만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목자는 지금은 예배를 마치고 쉬고 있으니 당신도 당신의 집에 가서 편안하게 쉬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배고파 울며 이곳 저곳을 방황했으되 그 목자는 자신의 이름과 선함이 알려지는 곳에는 언제든지 창고의 문을 활짝 열었다. 한편 많은 재물이 들어올 수 있는 기회를 만난 어떤 한 지체가 어떻게 해야 일이 잘 될까를 고민하다 목자에게 말씀과 기도를 받으면 복 받는 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므로 그 영혼도 제물을 하나 준비하여 부푼 마음을 가지고 사택을 방문했다. 그러자 목자는 그의 형편과 위치를 알고 있으니 그를 반갑게 맞아들이며 그가 가져온 수소와 송아지들을 창고에 묶어두고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흔들어 넘치도록 구하되 그의 자손들도 바다에서 수영선수가 되도록 간구했다. 이에 그는 만족하며 하얀 봉투를 기쁘게 건넨 후 발걸음도 가볍게 자신이 원하는 곳을 향하여 나아갔다. 그리고 그 목자는 아예 일년에 한두 번을 정하거나 수시로 지체들의 가정을 돌아다니며 말씀과 기도로 양들을 바다로 인도하며 하얀 봉투를 거두었다.

 

그러므로 여섯째 날의 다음 날인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해도 괜찮은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것이니 예를 들어 어느 한 백성이 자신의 범한 죄를 깨달아 율법이 정한 제물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찾아와서 제사를 드리고 싶어한다. 이때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오늘은 안식일이니 내일 오시오.'라고 말할 수 없으니 오직 한 영혼을 위하여서라도 그들이 제사를 드리는 것이 옳다. 그러나 독사자식들은 거룩을 깨닫지 못했기에 누구든 안식일에 제사의 제물을 가지고 오는 자는 안식을 범한 자이니 성전을 찾아온 그 영혼에게는 안식을 범한 죄가 있겠노라며 아무도 받지를 못했다. 그리하여 거룩과 안식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목자들은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찾아온 그 백성들을 오히려 죄와 세상가운데 늘 머물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다는 목자가 이렇게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하지 않는 것은 이방인의 목자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거듭난 한 영혼이 자신의 안에 거하는 그 죄를 이기지 못하고 넘어져 고통당하며 애통하고 있다. 그러면 그에게 죄에서 승리하는 길을 알려주는 것이 마땅하니 인자의 살과 물과 피로 거룩해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세상에서 돌이켜 십자가로 나오도록 인도함이 옳다. 그러나 거룩을 모르는 자는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으니 율법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믿는 자는 이미 회개했으니 다시 회개하면 믿음이 없고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비록 죄를 범하는 중에도 자유 하는 것이 큰 믿음이다.’라는 무식한 말을 하며 그가 죄와 어둠에서 돌이킴이 아니요 오히려 죄와 세상에 안일하게 머물러있도록 이끈다. 하지만 이런 목자들은 아버지와 양들을 위해 목숨 바쳐 일하겠노라 서원한적이 없는 거짓양치기들이니 자신은 주님의 사역에 충성하고 있다고 말하되 사실은 자신의 썩어질 육을 아끼고 있는 자들이다.

 

안식을 범해도 죄 없는 또 다른 경우는 그리스도께서 신령한 율법을 다 이루신 후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룩한 공동체에 드리고 필요한 만큼만을 받아서 사용하는 교회시대와는 달리 구약시대의 십일조에 대해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은 곡식과 짐승을 얻을 때마다 즉 십 분의 이를 제사장에게 바쳤다. 그러면 제사장은 거기서 반을 아버지께 감사 드리며 취했고 반은 육의 음식을 못 먹는 자들을 위해 남겨두었다. 그러다 가난한 자가 왔을 때 이것은 아버지께로 온 것이니 아버지께로 감사 드리라는 말과 함께 그것을 전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십자가의 전에는 십일조를 통해 여호와의 종들도 먹을 것이 항상 있으며 또한 게으른 자가 아닌 가난한 영혼들도 먹을 것이 항상 넘치도록 계획하셨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육신의 굶주림으로 인해 성전에 와 먹을 것을 좀 구할 때에는 그날이 비록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성전창고와 우리와 외양간을 열어 그 쌓아둔 것들을 내어주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야 심령이 가난한 자가 육의 힘을 얻은 후 거룩에 애쓰므로 새 생명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백성들을 위해서가 아니요 자신과 가족의 육과 또한 사람에게 영광을 얻고자 목자의 일을 하던 자는 굶주린 영혼의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으니 가난하고 낮은 자들을 내어쫓으며 오히려 자신을 의롭게 보이고자 '오늘은 안식일이니 너도 저기에 가서 안식을 취하라.'고 말하되 자신들은 늘 배가 불어있었다.

 

그런데 구약과 2천년 전의 이러한 상황은 첫 사랑을 잃은 교회시대 이방인도 동일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썩어질 것을 여기저기에 전하되 정작 자신의 공동체 안에 있는 가난하고 낮은 자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아니함은 그들은 자신들의 뜻과 계획에 도움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썩어질 것이 이러할진대 하물며 영의 양식이랴?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자신과 자기가족과 부한 자와 높은 자를 위해서는 늘 창고의 문을 열되 가난한 영혼들은 돌보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진리를 주시지 아니하신다. 그러므로 오늘날 배가 불어있는 목자는 육은 있어도 주지 않는 것이요 영은 없어서 못 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것이 진리라며 앞에서 말씀을 전하되 그들이 만일 십자가의 희생으로 전달되는 진리와 산제사로 이루어지는 거룩을 안다면 그렇게 행하고 있겠는가?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