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2:14-15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사람은 오직 한 사람과 한곳에만 자신의 마음을 둘 수 있다. 그리고 마음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또한 사람은 한번 먹은 마음을 돌이키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사람은 오직 자신만이 자기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은 사람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의 이러한 마음을 창조하신 분이 계시니 바로 하늘의 아버지시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깨끗하고 거룩한 마음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 마음이 쉽게 변치 않을 수 있도록 하셨으며 오직 한곳에만 둘 수 있도록 계획하셨다. 그리고 그 변함없는 깨끗한 마음을 사람의 깊은 곳 안에다 넣어두셨다. 그리하여 그 거룩한 마음이 사람 자신의 것이 된 것이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창조하신 분은 아버지시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그 거룩한 마음을 늘 깨끗하게 유지하길 원하신다. 또한 사람의 말과 행위가 그 깨끗한 마음에서 나오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남자는 그 깨끗한 마음으로 인하여 오직 한 여자만을 사랑하게 되어있다. 마찬가지로 여자도 그 깨끗한 마음이 있으니 오직 한 남자만을 순종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모든 남자와 여자가 이 거룩한 길을 걷는 것은 아니다. 오직 아버지께서 주신 그 깨끗한 마음을 유지하는 자들만이 이렇게 할 수 있다.

 

또한 사람은 마음을 두 곳에 두지 못한다. 오직 한 곳에만 마음을 두고 그 마음에 있는 것을 따라가는 게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마음을 둔 사람은 이 세상을 따라가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따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한다.

 

반면 그리스도께 마음을 둔 사람은 그리스도만을 따르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이 세상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을 따르는 자는 자신을 불의와 악으로 더럽히게 된다. 원수가 이끄는 이 세상이 불의하고 악하기 때문이다. 반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의와 거룩에 이르게 된다. 그가 의롭고 거룩하신 그리스도를 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럽고 악한 원수도 사람의 이러한 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원수는 사람이 그 거룩하고 선한 마음을 더럽히기 원한다. 즉 자신처럼 더럽고 악한 자가 되어 사망으로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수는 다른 남자와 다른 여자의 육을 보여주며 그의 마음을 이끈다. 그리고 이때 원수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자는 자신의 깨끗한 마음을 더럽히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을 더럽힌 그는 다른 육체와의 음행을 마음에 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실제로도 육체의 간음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원수는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보여주며 그의 마음을 이끈다. 그리고 이때 원수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자는 두 마음을 품는다. 하늘에 소망이 있다고 하며 이 땅의 소망을 마음에 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라도 마음을 원수에게 빼앗긴 자는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며 이 세상을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원수에게 마음을 빼앗긴 자는 마음과 육의 음행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이 더럽혀진 자는 영적인 음행도 서슴지 않는다. 즉 발람의 교훈을 가르치며 지키게 되는 것이다. 2:14을 보자.

 

그리스도전의 선지자들은 말씀을 전하며 백성들을 영적으로 인도하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 선지자들 중에 발람이라는 자가 있었다. 하지만 발람은 아버지께 받은 마음을 더럽힌 자였다. 즉 원수에게로 그 마음을 빼앗겨 깨끗한 마음과 변치 않는 마음을 더럽혔던 것이다.

 

그러나 발람은 육과 세상으로 가있는 자신의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더러운 마음을 그대로 품고 말씀을 전하며 백성들을 인도했다. 그러므로 발람은 참으로 마음 없는 행위를 보였던 자였다.

 

하지만 선지자는 말씀을 전하며 백성들을 인도하는 위치에 있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 위치에 있던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행음케 했다. 즉 자신처럼 그 마음 없는 행위로 인도했던 것이다.

 

발람이 어떻게 행음하도록 했는지 한 가지 비유를 통해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발람의 교훈을 서머나 교회시대의 믿는 자들이 지켰다. 하지만 일곱 교회의 환상은 교회시대의 교회가 피해야 될 일들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통해 지혜를 얻는 자는 교회시대의 믿는 자들이 어떻게 행하고 있는 지도 깨달을 수 있다.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하라고 하는 것은 한다. 하지만 참으로 마음을 다해 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만약 말씀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있다. “너희가 매일 몸을 씻고 하루에 세 번씩 손을 씻으면 너희 몸이 거룩해지리라.” 이때 이것을 보고는 매일 몸을 씻지 않고 손을 세 번 씻지 않을 자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도 그렇게 한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은 아버지께 마음 없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씀에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해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는 마음을 다해 거룩에 애쓰게 되어있다. 그리고 마음과 몸을 다해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는 마음과 몸을 다해 거룩에 애쓰게 되어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세상에 있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은 세상의 헛된 영광을 위해 다한다. 그리고 정성은 오직 자기의 육신을 위해 다한다. 그리고 힘은 정욕을 위해 쓴다. 그러니 이러한 자들은 아버지께로 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말씀을 몰라서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말씀은 잘 알되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 그리고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은 마음이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버지께로 마음이 없음에도 아버지 앞으로 나온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여러 가지 행위들을 드린다. 또한 그 거룩한 살과 피를 마음 없이 먹고 마시기까지 한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그 마음 없는 행위들을 받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 행위를 드리는 자들의 마음이 아버지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이 아버지께 있지 않으니 그의 마음은 더러운 곳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그 똥과 같이 더러운 것을 받지 않으시는 것이다.

 

하지만 서머나 교회시대의 모든 교회가 다 이렇게 발람의 교훈을 지킨 것은 아니었다. 몇 명은 안 되지만 아버지께만 마음이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적지만 마음과 함께 행위가 있는 자들도 몇 있었다.

 

그런데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은 이 마지막 교회시대에도 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은 목회자가 말하는 것을 듣고 행한다. 하지만 그들은 아버지께 나가려 하되 의문의 율법을 가지고 나간다. 그리고 그렇게 의문의 율법을 지키며 지키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믿음이 없다고 꾸중한다.

 

예를 들어 어느 교회의 한 목회자가 금요일 저녁에 철야기도를 하자고하며 모두 다 모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교회 교인들의 마음은 아버지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그럼에도 열심이 있는 자들은 그 금요일 날 철야기도에 나왔다. 또한 몇 사람은 목회자와 열심 있는 자들이 나오라고 하니까 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께 마음이 없으니 아버지의 뜻인 거룩에 마음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과 다른 영혼의 거룩을 위해 구할 수 없었다. 오직 육과 세상의 것만을 위해 구했다. 또한 사람이 많아지기만을 바라며 교회의 부흥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다.

 

그런데 열심이 있는 자들이 가만히 보니 옆에 있는 자들이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열심 있는 자들은 그들을 보면서 내가 저들보다 낫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기도회에 나오지 않은 자들보다는 자신이 훨씬 낫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믿음이 없다고 하면서 그들을 마음으로 꾸짖었다.

 

반면 목회자의 말을 듣고 나온 자들이 가만히 보니 많은 자들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나오지 않은 자들을 보며 내가 저들보다 낫다고 여겼다. 그리고 나오지 않은 자들을 향해 믿음이 없고 자신은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 기도회에 참석한 자들은 이러한 생각들과 함께 나는 매일 열 개의 계명을 지키고 있다는 마음을 품었다. 그리고 내일은 열한개의 개명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며 나는 그리스도 앞에 더욱 가까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런 자들은 십자가 앞에서는 매우 떨림으로 서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십자가를 스스로 가린다. 그리고는 오히려 끝까지 행위를 자랑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자신이 발람의 교훈을 지키고 있다는 것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은 늘 마음 없는 행위를 보인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마음이 없는 목자는 늘 양들에게 발람의 교훈을 가르쳐 지키게 한다. 그러나 발람의 교훈을 가르치는 자는 마지막에 사망의 심판을 받게 된다.

 

하지만 종의 사명과 심판을 깨닫는 목자는 그 발람의 교훈을 가르치는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다. 또한 그것을 깨닫는 양들은 그 발람의 교훈을 더 이상 지키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여자가 안 믿는 남편을 구원하려면 오직 순종밖에 없다. 그러므로 순종치 않고 자기의 말을 하는 여자는 어리석은 여자이다. 하지만 지혜로운 여자는 순종을 하되 남자에게 목숨을 바쳐 순종을 한다.

 

마찬가지로 종도 자신의 주인에게 목숨을 바쳐 순종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어리석은 종은 어리석은 여자처럼 행한다. 자기의 말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불순종하는 종에게는 오직 사망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사명을 버린 종의 심판에 대해 한 가지 비유를 통해 깨달을 수 있다.

 

넓은 바다에서 많은 사람을 태운 배 한 척이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배에는 오직 한 명의 주인이 있었으며 그 밑으로 여러 종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종들 가운데 누가 높고 누가 낮은 것은 없었다. 그런데 그 배의 주인은 오직 한 종을 택해 모든 종들에게 주인의 말을 전하게 했다. 그러나 그 택함 받은 종은 주인의 말만 전하지 않고 자기의 말을 전했다. 그러므로 그 주인의 뜻이 이루는 것이 아니요 택함 받은 종의 뜻이 이루어졌다. 어느덧 시간이 흐른 후에 그 주인이 나와 보니 주인의 뜻이 반 정도밖에 안 이루어져있었다. 반면 주인의 뜻이 아닌 것이 오히려 크게 이루어져있었다. 이에 그 주인은 그 택한 종을 불러어떻게 된 일이요?’ 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 종은 주인에게 솔직히 이야기를 했다. 이에 그 주인은 그를 용서하고 한 번 더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전과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즉 그 택함 받은 종은 또다시 주인의 말만을 전하지 않고 자기의 말도 전했던 것이다. 이에 그 주인은 다른 종들을 불러서 그 택한 종을 바다에다 던지라고 했다. 그러므로 처음 택함 받은 종은 사망으로 들어가고 그의 모든 것들은 다른 종에게 넘어갔다.

 

이와 같이 종의 사명은 오직 주인의 말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의 사명이 무엇인지 깨닫는 목자는 발람의 교훈을 가르치는 것에서 돌이킬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종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끝까지 주인이 되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는 육신의 사망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발람의 교훈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끝까지 발람의 교훈을 가르치며 지키는 자에게는 사망의 심판을 내리신다.

 

이처럼 목자로서 발람의 교훈을 가르치는 자는 종의 사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종의 사명을 잃어버린 것은 자신의 깨끗한 마음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늘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양들도 역시 자신의 마음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음을 지키지 못한 자들은 발람의 교훈 외에 지키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니골라당의 행위이다. 2:15을 보자.

 

이 말씀을 깨달으려면 우선 교회의 직분에 대해 알아야 한다. 아버지께서 택하신 교회에 사도의 직분은 없다. 오직 감독 목사 장로 집사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때의 경우에는 감독의 직분도 없다. 교회시대의 마지막 때에는 거룩하신 영께서 그 감독의 직분을 직접 행하시기 때문이다.

 

게다가 택하신 교회에서는 목사와 장로와 집사의 직분을 세우지 않는다. 하지만 직분을 세우지 않는다고 하여 그 일들을 행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선물을 따라 그 선물을 받은 자들이 그 일들을 행한다.

 

한편 그 일을 행하는 자들이 자신의 직분을 정확하게 표시할 때도 있다. 즉 그 나라가 공식적으로 원하는 서류에만 그들의 직분이 들어간다. 그러므로 누구는 감독이요 누구는 목사요 누구는 장로요 누구는 집사라고 하는 것은 오직 세상법칙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그 세상법칙이 교회를 주관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경우를 제외하고 모두 함께 모였을 때는 서로가 형제자매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모든 택함 받은 교회는 직분에 대해 이렇게 행하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 거룩하신 영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것이 초대교회에서 끝났으니 지금은 사람이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원하는 자를 뽑아 그 직분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거룩하신 영의 선물도 인정치 않고 거룩하신 영께서 직분을 세우신다는 것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모든 것이 초대교회에서 끝났다고 하면 지금은 은혜가 없는 것이다. 또한 아버지의 섭리도 다 이루어졌으니 지금은 섭리가 이루어져가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2천년 전에 이기셨으니 지금은 이 세상을 이기는 힘도 없게 된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에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하는 자들은 너무나도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런데 그 어리석은 자들은 이미 에베소교회시대부터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로 인하여 육의 힘이 강한 자가 교회의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육의 힘이 약한 자들은 아래로 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강한 자는 더욱더 강해지며 약한 자들은 계속 약해져 갔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 거룩하신 영께서는 오히려 약한 자들과 함께 하셨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지금까지 약한 자들만이 그 거룩함을 유지해온 것이다.

 

그러나 그 어리석고 강한 자들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오히려 세상과 타협을 했다. 또한 나라와 타협하고 원수와 타협하며 더욱더 높아져갔다. 그러므로 지금도 강한 자는 계속 강해지고 약한 자는 더욱더 약해지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마지막 날에 그 약한 자를 택하신다. 그리고 그 약한 자를 통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 그러므로 강한 자는 마지막 때에 오히려 애통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니골라라는 것은 육의 힘이 강한 자가 교회의 높은 직분에 오르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높은 곳에 올라가 앉기 위해 무엇이든지 하게 된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이 마지막 때의 상황에 맞게 말한다면 니골라는 이런 자이다.

 

어떤 자가 나는 목회를 하겠다고 하며 신학교에 들어간다. 그리고 졸업할 때가 되니 자기를 부르는 곳에 들어가 전도가가 된다. 그리고 거기서 전도사의 직분으로 있다가 졸업을 하며 강도사가 된다. 그리고 강도사로 있다가 잠시 후 목사의 직분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가 그 목사의 자리에 앉은 것은 아버지의 뜻에 마음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즉 거룩에 애쓰고자 그 자리에 올라간 것이 아니다. 또한 아버지의 뜻인 거룩에 애쓰다 그 거룩한 자리에 앉게 된 것도 아니요 사람들을 거룩하게 이끌고자 함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아버지와 관계없이 그곳에 올라간 것이다.

 

게다가 그는 그곳에 올라가 자기를 섬기는 자를 많이 보니 매우 기뻐하게 된다. 그리고 그 높은 곳에 앉아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가르친다. 즉 자신과 같은 높은 자리를 탐내게 하며 그것을 위해 일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열심을 내는 것은 바로 그 높은 자리를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발람에게 내리시는 동일한 심판을 니골라당에게도 내리신다. 그리고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킨 자들에게도 내리신다. 그러므로 그들도 발람의 교훈을 가르치며 지킨 자들처럼 사망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종의 사명과 심판을 깨닫는 목자는 그 니골라당의 교훈을 버릴 수 있다.  또한 그것을 깨닫는 양들은 그 니골라당의 교훈을 더 이상 지키지 않을 수 있다.

 

주인은 주인의 일을 하며 종은 종의 일을 하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종의 일은 주인이 하라는 것을 하는 것이며 그런 종이 참된 종이다.

 

예를 들어 어떤 주인이 자신의 종에게 이러한 말을 하고 보낸다. “너는 사람들에게 가서 내 말을 전하여라.” 이때 종은 주인이 가라는 곳에 가서 주인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그 말을 다 전한 후에는 곧바로 뒤돌아 서서 오는 자가 참된 종이다. 하지만 어리석은 종은 주인의 말을 전하며 또한 자기의 생각도 전한다. 그리고 더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말한 것을 사람들이 이루는지 안 이루는지 지켜본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탐낸다. 그리고 그들은 그 종을 통해 그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종이 전하는 주인의 말은 지키지 않고 오히려 종의 말을 행한다. 그리하여 주인의 말을 듣지 않고 종의 말을 듣는 자는 계속 높아진다. 그러나 그런 자들과 그런 종은 어리석은 자요 더욱 어리석은 자인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며 자기의 욕심을 품는 자가 있다. 그러므로 그런 자에게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용해 자신이 높아지려 것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그를 합당하게 받지 않으신다. 오히려 책망하시고 그 종을 내어 쫓으시는 것이다.

 

반면 충성된 종은 끝까지 주인의 말을 듣는다. 그리고 주인이 주는 권세만 전해주고는 주인에게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그 충성된 자를 기뻐하시며 그를 높여주시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목자들과 많은 양들이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원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더럽혀진 마음을 끝까지 돌이키지 못한다. 원수에게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발람과 니골라의 교훈에서도 끝까지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돌이키지 않은 자들을 심판하신다. 그러므로 발람과 니골라의 교훈을 끝까지 지킨 자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사망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마음을 드리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또한 마음이 있되 행위가 있는 자를 더욱더 불쌍히 여기신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을 다해 아버지를 섬긴 자에게 그 감추었던 만나를 주시니 오직 그들만이 그것을 먹게 된다.

 

그런데 아버지의 긍휼하심을 그들만이 얻는 것은 불공평하고 불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아버지의 의로우시고 정직하신 성품으로 인한 것이다. 그 이유는 마음의 비밀을 창조하신 아버지께서 그들의 마음을 더듬어 내셨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깨끗함을 아신다. 또한 그들의 말과 행함이 그 거룩한 마음에서 나온 것도 아신다. 그리고 그 마음을 아시니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 긍휼을 베푸신다. 그러므로 그 긍휼하심은 의로우시고 정직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