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신령한 율법을 이루셨으나 의문의 율법은 폐하셨으니 만일 그 두 가지의 율법이 동일한 것이면 모순이 되어버리고 만다. 아버지의 말씀에는 이렇게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으니 교만한 자는 깨달음을 구하기보다 자신이 옳음을 나타내고자 거룩한 말씀을 이용한다. 또한 사람은 행위로는 의롭게 되지 못하나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했으니 행위와 행함은 다른 것이어야만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행위라는 것은 아버지께서 명하시지 않은 것을 행하는 것이니 사람의 기준으로 선하고 옳게 보이는 것도 행위일 뿐이다. 반면 믿음의 행함은 아버지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니 예를 들어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기 전에 세상에서 돌이켜 방주로 들어가라는 말씀을 미리 전하셨다. 이때 믿고 들어간 자는 의로 여기심을 받았으나 안 믿는 자들과 믿는다며 안 들어간 자들은 세상과 함께 사망으로 내려갔다. 마찬가지로 소돔과 고모라가 불로 멸망 당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을 때도 이와 같았으되 소돔과 고모라는 마지막 때의 예표이니 하늘에서 내리는 유황비로 세상이 멸망을 당하기 전에 심판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자들을 위해 마지막 때에 예비하신 방주가 바로 광야의 예비처이다.

 

비판치 말라는 것도 이렇게 모순처럼 보이는 말씀들 가운데 하나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옳고 그른 것을 말씀을 기준으로 스스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셨고 거룩하신 영을 통해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바울도 스스로 판단하라는 말씀을 늘 거룩하고 신령한 교회에 전했다. 그러나 판단을 명하신 그리스도께서 비판하지 말라고도 하셨으니 모순이 되지 않으려면 판단과 비판이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판단과 비판의 각기 다른 정의를 깨달으면 비판은 멈추되 판단은 계속하므로 자신과 공동체거룩을 유지할 수 있다.

 

우선 판단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한 몸으로 모이는 상황에서 깨달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거룩하고 정결한 공동체와 함께하는 한 지체가 간음을 범했을 때 그 영혼을 앞에 두고 다른 지체들과 함께 있을 때 오직 말씀을 편다. 그리고 간음한 그 영혼에게 이르길 그가 아버지께로 범죄한 것이요 또한 거룩한 지체로서도 범죄하였으니 돌이키라는 말씀을 명한다. 이처럼 오로지 말씀으로 행하는 그것은 판단이 되는 것이다.

 

이때 말씀으로 판단을 받은 자가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거룩을 이루기 위해 돌이킬 때에는 모든 지체들이 그를 따뜻하게 받아준다. 그리하여 돌이킨 자는 다른 자들과 함께 그 생명의 길을 계속해 걸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판단을 받고도 돌이키지 아니할 때에는 두 번 세 번 다시 말씀으로 그에게 명한다. 하지만 말씀으로 판단을 받았음에도 끝까지 돌이키지 아니하는 자는 한 몸에서 그를 내어 쫓는 것이 옳음은 적은 누룩이라도 온 덩어리에 퍼지기 때문이다.

 

반면 비판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니 공동체의 한 지체가 똑같은 간음의 죄를 범했다. 이때 말씀으로도 그를 명하여 돌이키라고 똑같이 말하되 범죄한 것에 대하여 그 영혼에게 어떠한 이유나 어떠한 말이나 어떠한 행위를 통해 그의 범죄한 모습을 가릴 수 있도록 말한다면 그것은 비판이다. 또한 그에게 말하길 범죄하게 된 이유를 대라고 하는 것도 역시 비판이되 간음한 자가 간음한 자에게 말씀이 이러하니 돌이키라고 하는 것은 세상말로 내로남불이니 곧 바리새인의 비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으며 제자들에게 계시를 주실 때도 역시 비판치 말라고 명하셨다. 그러므로 거룩한 공동체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그런 비판적인 말들은 조금도 들을 필요가 없다. 사람은 사람의 말과 생각과 의와 주장을 듣고 의와 생명에 이르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말씀에 순종하므로 이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과 타협하기보다 사람과 타협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언제든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 맞추는 자는 어떻게 사람들을 판단할 수 있냐고 생각하되 판단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요 말씀이다. 또한 말씀으로 판단을 받은 그 영혼을 그의 안에서 살피시는 분이 계시니 그 영혼의 마음의 판단은 오직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내리실 것이요 그리하여 한 몸에 거하는 자들은 오로지 비판이 아닌 판단만을 하는 것이 옳다. 그래야 자신도 원수의 선악에 의해 간음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그것을 보며 교훈을 삼을 것이요 또한 그 죄가 거룩한 공동체에서 더 이상 썩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자하는 마음이 없거나 포기한 영혼들은 자기의 의와 생각에서 돌이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아니하며 또한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과 타협하는 데서도 돌이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그런 자들에게는 말씀의 깨달음을 허락하시지 아니하신다. 그리하여 그들은 오히려 자기의 의와 깨닫지 못하는 말씀들을 합해 믿는 자들끼리 서로 거부하며 비판하며 싸운다.

 

예를 들어 어떤 자는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의 깨달음을 얻지 못하니 자신은 판단하지 않겠다느니 완전한 사람이 없다느니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들을 하며 범죄한 그 영혼에게 명하여 돌이키라는 말조차 전하지 못한다. 게다가 어떨 때는 가장 의롭게 보이는 말로 즉 모든 심판은 하나님이 행하시니 우리는 무조건 용서와 사랑을 베풀고 그저 기도하자며 말씀의 판단을 말씀의 비판으로 바꾸므로 자신이 아버지보다 더 의로운 자리에 앉는다.

 

반대로 어떤 자는 판단의 정의를 모르니 판단하거나 끊어내라는 그 말씀들을 가지고 범죄한 영혼들을 판단하되 아직까지 그 죄를 끊어내지 못한 자신의 생각과 의와 감정과 경험으로 판단한다. 특히 자신의 생각과 관점이 다른 자들에 대해서는 더욱더 강하게 판단하되 늘 거룩하신 말씀들을 찾아 이용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심판보좌에 앉아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는 그 행위를 육에서 나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까지 멈추지 아니한다.

 

그런데 이렇게 판단의 의미를 모르고 말씀으로 판단하기를 즐기는 자들이 만일 권위를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사람의 피를 흘리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역사가운데서 구약의 제사장으로부터 수많은 자들이 자신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며 칼로 찌르거나 불로 태워 다른 믿는 자들의 피를 흘리고 자신도 그 사망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그것이 참으로 간편해졌으니 교만한 바리새인들의 자손들은 키보드와 마우스로 이 순간에도 그 피 흘림을 멈추지 않고 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